'에반게리온' 세대의 정체성을 폭로하다… 복제된 세계, 원본은 죽었다

2025-10-14 17:55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옥승철 작가의 개인전 '프로토타입'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미지들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마치 '에반게리온'이나 '공각기동대' 같은 고전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들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이들은 조종석에 앉아 전투를 치르는 듯 긴장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이러한 풍경은 현실 세계보다는 잘 짜인 가상 세계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옥승철 작가는 2017년 인디밴드 '아도이(ADOY)'의 앨범 커버 디자인을 통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디지털 이미지에 익숙한 세대의 감성을 팝아트 형식으로 풀어내는 작업으로 주목받아 왔다. 이번 전시는 그의 첫 대규모 개인전으로, 작가의 세계관을 집대성하여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번 전시의 핵심 주제는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 소비 방식, 즉 '복제와 변형, 유통과 삭제'다. 작가는 '프로토타입(시제품)'이라는 전시 제목처럼, 마치 공장에서 시제품을 끊임없이 찍어내듯 이미지를 복제하고 미세하게 변주하는 방식을 통해 원본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무한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환경에서 원본이라는 개념이 유효한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80여 점의 작품 전반에 녹아있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예술 작품의 유일무이한 아우라에 도전하는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문화 자체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작가의 회화 작품들은 매끈하고 차가운 질감과 정교한 마스킹 기법을 통해 극단적인 평면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화면 속 인물들은 대부분 무표정하거나, 무언가와 대치하는 듯한 긴장된 상황에 놓여 있다. 작가는 이러한 인물상을 통해 디지털 환경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노출되고 평가받으며, 보이지 않는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복합적인 내면과 정서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낸다. 대표적인 작품 '타이레놀'은 우리가 약물에 점차 내성이 생기는 것처럼, 수많은 디지털 이미지의 자극에 점차 무뎌져 가는 현대인의 감각 상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전시장에서 회화와 함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조각 작품들은 인물들의 감정을 더욱 극적으로 제거한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높이가 2.8미터에 달하는 대형 조각 '프로토타입'은 이러한 특징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신화 속 메두사의 머리가 잘린 모습을 형상화한 이 조각은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이는 언제든 복제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현대 사회 속 개인의 익명성과 실존적 불안을 상징한다. 결국 옥승철 작가의 작업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디지털 세대가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과 불안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이를 독창적인 예술 언어로 재구성하려는 성공적인 시도로 평가받는다.

 

서성민 기자 sung55min@trendnewsreaders.com

컬쳐라이프

물, 바람, 땅…자연의 모든 것을 담았다, 단 한 번의 공연으로 한국무용 완전 정복

종합선물세트'라는 윤혜정 예술감독의 표현처럼, 서로 다른 개성과 역사를 지닌 8개의 전통 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어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 개념인 '미메시스', 즉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고 재현한다는 철학적 주제를 바탕으로, 각각의 춤은 물의 흐름(교방무), 바람의 형상(한량무), 땅의 기운(소고춤) 등 자연의 본질적인 요소를 형상화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단순한 춤사위를 넘어, 자연 속에서 생성되고 발전해 온 우리 전통과 민속의 깊은 뿌리를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내기 위해 엄선된 7개의 춤에 마지막으로 살풀이춤을 더해 완성된 8개의 레퍼토리는 한국 춤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과 깊이를 증명한다.'미메시스'의 가장 큰 특징은 마치 잘 차려진 뷔페처럼 관객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춤을 골라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첫 장을 여는 교방무가 기생들의 유려하고 절제된 움직임으로 물의 흐름을 그려낸다면, 곧이어 펼쳐지는 한량무는 불었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바람처럼 변화무쌍한 에너지로 무대를 장악한다. 태평소 가락과 어우러져 폭발적인 흥을 분출하는 소고춤의 역동성은 관객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종교적 경건함과 인간적 고뇌가 담긴 승무는 깊은 사색의 시간을 선물한다. 이처럼 정적인 여백의 미와 동적인 에너지의 폭발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구성은 한국 무용에 익숙지 않은 관객들마저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각 춤의 개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8개 중 6개의 음악을 새로 작곡한 유인상 음악감독의 미니멀한 접근 방식 또한 춤 본연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이번 공연은 시각적인 즐거움 또한 놓치지 않았다. 김지원 의상 디자이너는 전통 한복의 '하후상박(上薄下豊)' 실루엣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파격적이면서도 우아한 무대 의상을 완성했다. 특히 한량무에서는 K팝 아이돌을 연상시키는 현대적인 의상에 전통 갓의 챙을 유난히 넓게 제작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버선발의 섬세한 움직임을 강조하기 위해 속치마를 시스루 소재로 만들거나 무릎, 뒤꿈치를 과감히 노출하는 등 혁신적인 시도를 선보였다. 이는 전통을 어느 선까지 현대적으로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의 결과물로, 관객들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관람 포인트가 되고 있다. 화려하면서도 각 춤의 특징을 살린 의상은 무용수들의 몸짓과 결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예술 작품으로 빛을 발한다.'미메시스'는 스타 무용수의 참여로 더욱 화제를 모았다. TV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통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현대무용가 기무간이 서울시무용단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며 장검무와 태평무 무대에 올랐다. 그는 "한국 무용은 정서적으로 깊은 내면을 다루며, 채우기보다 비워내는 '멈춤의 미학'이 있는 춤"이라고 설명하며, 이번 공연을 통해 현대 무용과 한국 무용의 본질적인 차이를 한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에너지를 채워서 밖으로 분출하는 현대 무용과 달리, 무용수가 감정을 비워낸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 한국 무용의 정수라는 것이다. 이처럼 '미메시스'는 전통의 재현을 넘어, 현대적인 해석과 스타 무용수와의 협업을 통해 한국 춤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조망하는 의미 있는 무대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