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당했는데…은행 믿고 신청했더니 100명 중 10명만 '찔끔' 배상

2025-10-10 17:53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 구제를 위해 도입된 은행권 자율배상 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제도 시행 후 지난 1년 8개월간 5대 시중은행에 접수된 피해 배상 신청 건 중 실제 배상까지 이어진 경우는 10%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이인영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KB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 등 5대 은행에 접수된 보이스피싱 피해 관련 상담은 2135건에 달했지만, 정식으로 배상 신청이 이뤄진 것은 173건에 그쳤다. 그마저도 은행이 심사를 완료한 92건 중 실제 배상이 결정된 사례는 단 18건에 불과해, 전체 신청 건수 대비 약 10%, 상담 건수와 비교하면 1%도 채 되지 않는 처참한 실적을 보였다.

 

은행의 문턱은 높고 까다로웠다. 신청된 173건 중 3분의 1이 넘는 60건(34.7%)은 피해자가 사기범에게 직접 자금을 이체했거나, 연애를 빙자한 사기인 '로맨스 스캠', '중고 거래 사기' 등이라는 이유로 아예 심사 대상에서부터 제외됐다. 현행 자율배상 제도가 은행의 과실이 명확한 '비대면 금융사고'에 한정되어 있어, 교묘한 수법에 속아 넘어간 대다수 피해자는 구제받을 길이 원천적으로 막혀있는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은행의 과실이 인정되어 배상이 이뤄진 18건조차 피해자가 신청한 금액이 온전히 보전된 경우는 없었다. 이들 18건의 총피해 신청액은 6억 3762만 원이었지만, 은행이 실제로 지급한 배상액은 22.1% 수준인 1억 4119만 원에 불과해 피해자들은 막대한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은행별 대응 역시 제각각이었다. 국민은행이 6건(8352만 원)으로 가장 많은 배상을 실시했고, 신한은행 7건(1316만 원), 농협은행 5건(4451만 원)이 뒤를 이었다. 반면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은 같은 기간 단 한 건의 배상 사례도 없어 보이스피싱 피해 구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이러한 문제는 2금융권에서 더욱 심각했다. 카드사, 증권사, 보험사, 상호금융 등에서 올해부터 자율배상 제도가 도입됐지만, 전체 신청 123건 중 배상이 이뤄진 것은 단 2건(1.6%)에 그쳐 사실상 제도가 작동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금융사들이 '자율'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피해자 보호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결국 정부와 정치권이 직접 칼을 빼 들었다. 금융당국은 지난 8월, 금융회사의 직접적인 과실이 없더라도 보이스피싱 피해액의 일부 또는 전부를 배상하도록 책임을 부과하는 '무과실 배상 책임' 도입을 발표했다. 이는 피해자가 사기범에게 속아 직접 돈을 보낸 경우에도 금융회사가 배상 책임을 지도록 하는 강력한 조치다. 당정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안을 연내에 처리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어, 법안이 통과되면 그동안 구제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수많은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황이준 기자 yijun_i@trendnewsreaders.com

컬쳐라이프

\"서양 꽃꽂이와는 근본이 다르다\"…우리가 몰랐던 K-꽃꽂이에 담긴 진짜 철학

중문화축전'의 일환으로, 관객 참여형 궁중극 '시간여행'과 노년층 맞춤형 화훼 체험 '동궐 장원서'가 관람객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제공한다. 단순한 관람을 넘어 역사의 현장을 직접 거닐고, 배우와 소통하며 이야기의 일부가 되는 새로운 형태의 궁궐 체험은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재미를 안겨주었다. 이번 행사는 역사의 공간이 가진 힘을 극대화하여, 관객이 직접 시간 여행자가 되어 과거와 현재를 잇는 특별한 경험을 하도록 기획되었다.이번 축전의 백미는 단연 120분간 창경궁의 네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궁중극 '시간여행'이다. 이 극은 관객을 단순한 구경꾼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명정문 앞에서 관객들은 가뭄과 홍수로 고통받는 영조 시대의 백성이 되어, 임금이 직접 곡식을 나눠주는 구휼 의식 '임문휼민의'에 참여한다. 배우들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고 문답을 주고받으며 극의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특히 외국인 관람객을 위한 통역관 배역을 따로 두어 언어의 장벽을 허문 세심함이 돋보였다. 명정전에서는 성종 시대의 궁중 연회가 재현되고, 경춘전에서는 정조의 탄생 설화가, 통명전에서는 관객이 직접 간택 후보가 되어 왕비가 결정되는 극적인 순간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역사를 책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고 참여하는 살아있는 경험으로 탈바꿈시킨 파격적인 시도다.궁궐의 또 다른 한편인 대온실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행사가 열렸다. 조선시대 궁궐의 조경과 화훼를 담당하던 '장원서'를 주제로 한 전통 화훼 체험 프로그램은 '60세 미만 참여 불가'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어 눈길을 끌었다. 오직 노년층만을 위해 마련된 이 공간에서 참여자들은 '반려화분 만들기'를 통해 궁중 원예 문화를 체험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전통차와 다과를 즐겼다. 특히 한국 꽃꽂이 명인에게 직접 듣는 우리 꽃꽂이의 철학은 프로그램의 깊이를 더했다. 서양이 형태와 이성을 중시하며 플로랄 폼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하늘과 땅, 인간의 조화를 중시하며 자연 소재를 그대로 활용하는 방식에서 출발했다는 설명은 참여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이날 행사에 참여한 대한노인회 종로구지회 소속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행복이 가득했다. 83세의 한 참여자는 "나이 먹은 사람들을 특별히 초청해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해준다는 사실에 오는 내내 설레고 행복했다"며 "앞으로 이런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벅찬 소감을 전했다. 생전 처음으로 이런 문화 체험에 참여해본다는 77세의 또 다른 참여자 역시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창경궁의 가을 축제는 잊혔던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리고, 특정 세대를 위한 맞춤형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행사를 넘어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