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 끊긴 호르무즈… 기름통 바닥까지 'D-4'
2026-03-23 09:37
지난 20일, 충남 서산 대산항에 입항한 유조선 ‘이글 벨로어호’의 닻이 내려지는 순간, 국내 정유업계에는 안도감 대신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이라크 알바스라 항구에서 원유 200만 배럴을 싣고 이란의 봉쇄망을 뚫고 들어온 사실상 ‘마지막 생존자’이기 때문이다.이 배가 싣고 온 원유는 HD현대오일뱅크의 정제 시설을 단 4일간 돌릴 수 있는 분량에 불과하다. 앞서 도착한 ‘베리 럭키호’의 물량을 합쳐도 고작 일주일 치의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업계 관계자가 “지금부터는 진짜 절벽”이라고 토로한 배경에는, 더 이상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들어올 배가 없다는 서늘한 공포가 깔려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최후통첩과 이란의 강경 대응이 맞물리며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장기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문제는 한국 에너지 안보의 구조적 취약점이다. 국내 도입 원유의 70%가 중동산이며, 그중 90% 이상이 이 좁은 해협을 통과해야 한다. 정유사들은 필사적으로 우회로를 찾고 있다. 사우디 아람코를 대주주로 둔 에쓰오일은 홍해 연안의 얀부(Yanbu) 항구 송유관을 활용해 숨통을 틔웠고, HD현대오일뱅크와 GS칼텍스 등도 얀부항과 UAE 푸자이라 항구 연결을 타진 중이다.

미국, 멕시코 등 비중동 지역으로 눈을 돌려보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국내 정제 시설 대부분이 중동산 원유의 성상(性狀)에 최적화되어 설계된 탓이다. 중동산 원유를 베이스로 깔지 않고 비중동 원유만으로는 공장을 원활하게 돌리기 어렵다는 것이 기술적 한계다.
위기는 정유사를 넘어 석유화학 업계로 전이되고 있다. 기초 원료인 나프타 재고가 통상 2주 치에 불과한 상황에서, 공급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동 물량이 끊길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여천NCC 등 주요 석화사들은 이미 가동률 조정에 들어갔다. 이는 곧 플라스틱, 합성수지 등 전방 산업의 생산비 급등과 수급 불안이라는 도미노 현상을 예고한다.

다만, 극한의 위기 속에서도 역설적인 기회는 존재한다. 글로벌 공급 과잉에 시달리던 석유화학 업계의 경우, 경쟁국인 중국과 중동의 설비 가동 중단이 반사이익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제품 공급이 줄어들면 가격이 폭등해, 살아남은 기업은 마진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는 논리다. KB증권 전우제 연구원은 “봉쇄가 지속되면 5월부터는 부르는 게 값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금의 사태는 단순한 수급 차질을 넘어,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를 가르는 치킨게임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글 벨로어호’가 내려놓은 마지막 원유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 한국 산업계는 생존을 위한 가장 혹독한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황이준 기자 yijun_i@trendnewsreaders.com

과 연계해 진행되는 이번 '20/21세기 봄 경매'는 크리스티의 새로운 아시아 태평양 본사에서 열리는 첫 메이저 세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이번 경매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1991년작 ‘추상회화(Abstraktes Bild)’다. 130억 원에 육박하는 추정가가 매겨진 이 작품은 작가의 런던 테이트 미술관 회고전 시기에 제작됐으며, 그의 작품 세계에서 보기 드문 붉은색이 주를 이룬다. 특유의 스퀴지 기법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물감 층 아래로 드러나는 다채로운 색의 흔적이 압도적인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리히터의 작품과 함께 주목받는 또 다른 걸작은 중국 근대미술의 거장 산유의 ‘무릎 꿇은 말’이다. 약 46억에서 79억 원 사이의 추정가를 기록한 이 작품은 작가의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레비 가문이 직접 소장해 온 것으로, 수십 년간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던 희소성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이 외에도 현대 미술의 살아있는 전설 데이비드 호크니, 점과 호박으로 유명한 쿠사마 야요이, 중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자오우키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이 대거 출품되어 아시아 컬렉터들의 치열한 경합을 예고하고 있다.한국 미술의 약진도 눈에 띈다. 단색화 거장 박서보의 2009년작 ‘묘법’이 약 2억 원, 이우환의 1978년작 ‘선으로부터’가 최고 22억 원의 추정가로 출품되는 등 총 11점의 K-아트 작품이 경매에 오른다. 하종현, 이성자, 김창열 등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글로벌 미술 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귀추가 주목된다.크리스티의 아시아 진출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번 경매는 단순한 미술품 거래를 넘어, 아시아 미술 시장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 경매는 이틀간 이브닝 세일과 데이 세일로 나뉘어 진행된다.